희망돼지를 키우면서 ~~ 내 책상머리에서는 얼마 전부터 투명돼지 한 마리가 자라고 있다.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수만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기르고 있는 이른바 희망돼지이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나면 고단했던 삶의 잔해인양 주머니속에 남은 동전을 모두 털어 돼지밥을 준다. 이 돼지가 만삭이 되면 나는, 묵직한 손맛이 마음을 든든하게 하는 이 돼지를 안고 자원봉사자들이 관리하는 돼지우리로 가서 노무현을 위한 정치자금으로 내놓을 것이다.
어디서 돈이 생기는지는 몰라도 선거때만 되면 선심을 팍팍 쓰는 낡은 정치인들이 보기엔 이 돼지저금통이 낳을 몇 만원의 동전이 우습게 느껴질게다. 하지만, 이 돈에는 버스비를 아껴 두 구역을 걸어다니거나 24시간 편의점의 삼각김밥 두 개로 점심식사를 하는 서민적 삶의 간절함이 배어 있다. 나는 조금씩 무거워지는 돼지의 무게만큼 미래를 향한 내 희망도 자라나고 있음을 의심치 않으면서 기도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나는 이 돼지에 이민가지 마세요, 노무현이 있잖아요라는 스티커를 붙여 놓았다.
선거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것은 일종의 어두운 상식이 되어 있다. 선거때면 식당가와 관광지가 때아니게 북적대고 임시직 일손에 의지하던 사업장들은 일할 사람이 없어 속앓이를 한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출마자와 유권자 양측이 공모하는 검은돈의 잔치가 아닐 수 없다. 말로는 깨끗한 정치를 원한다면서도, 정치가란 원래 더러우니 돈을 받고 표를 파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유권자들이 엄청 많다. 선거때를 빙자하여 상상을 넘는 돈을 주고 장차 정치가를 수족으로 부릴 권력을 예약하는 재벌과 기업들은 또 얼마나 될까. 그런가하면 어떻게 마련하든 정치자금을 잘 마련하는 게 정치가의 역량이라는 어이없는 소리도 횡행하고, 그러다보니 심지어 세금도둑질까지 서슴치 않던 정치가도 있다. 이런 관행이 우리 정치를 선거때만 되면 몇십 년 뒤로 되돌리고 정치가로 하여금 부정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했음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왜, 그 관행으로부터 탈출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왜, 우리는 알지 못했을까.
정치의 계절은 월드컵보다 자주 돌아오지만, 정작 정치는 언제나 잘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 수행되는 아주 특별한 그 무엇이었다. 많은 피와 눈물로 독재자의 손에서 빼앗아온 주권은 어느 새 직업정치꾼들에 의해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해 있었다. 유권자들은 자신이 들러리임을 확실히 알았기에 고무신 한 컬레라도 챙겨먹어야 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번 대통령 선거는 무척 다르다. 노무현이 있으니까.
이 사람은 앞으로도 우리 나라 정치의 틀을 영원히 다르게 만들 것이다. 희망돼지는 재벌의 검은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는 선언이며, 국민들에게서 빚을 얻어 정책으로 상환하겠다는 야심찬 기획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자판기 커피 한 잔을 아끼고 치부해둔 몇 개의 동전, 당신이 담배가게 앞에서 망설이다가 그래!하며 거두어 쥔 한 장의 지폐가 나날이 쌓여 만드는 깨끗한 정치혁명이다. 이런 발상을 할 줄 아는 정치인이 있다는 것은 그의 지지자에게든 반대자에게든 가슴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특정소수의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것, 이것이 정치의 쌩기초가 아닐까.
그런데 국민에게 희망돼지를 분양한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정치자금을 마련할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 것만이 아니다. 이는 정치의 실제주인이 누구인지를 노무현이 정확하게 안다는 뜻이자, 국민에게 바로 그 주인됨의 가치와 의미를 정확하게 깨달아내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파랗고 노랗고 빨간 투명돼지 저금통을 나누어주는 행위는, 십시일반의 모금이라는 의미를 훌쩍 뛰어넘는다.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모으기 위해 하루의 삶을 점검하는 나날이 모여 정치를 우리의 일상 가까이 머물게 하고 정치가의 일에 대해 생각하라는 요구, 내 삶의 손때가 묻은 돈으로 수행하는 선거라는 각성을 통해 바로 나 자신이 피할길 없이 정치에 연루되어 있음을 인정하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그 어떤 정치가가, 이토록 진심으로 시민들의 참여를 바라는가. 그 어떤 정치가가, 이토록 간절하게 돈이나 표를 넘어선 적극적 관심을 요구하는가.
제가 바로 노무현입니다
87년 6월 시민항쟁의 와중에서였다. 나는 6월 10일에서 6월 29일에 이르는 기나긴 시기를 거지반 병원 중환자실에서 보내고 있었다. 정상분만에 실패한 후유증 때문이었다. 어느 날, 간호사가 시커먼 다이얼 전화기를 품에 안고는 긴 전화줄을 둘둘 풀어가며 내게로 왔다. 수화기 안에서는 후배의 흥분된 외침과 엄청난 소음이 섞여서 들려왔다. 내가 제대로 알아들은 것은 노벤, 노벤, 노벤이라는 외침뿐이었다. 아무리 꽁꽁 닫아놓아도 어쩔 수 없이 스며드는 최루가스에 신생아실의 아기들은 흡사 개구리떼처럼 울어대다가 천식과 폐렴에 걸리고, 죽었다가 살아난 어미는 일어나 앉을 수도 없는 몸으로 그 아기에게 젖물릴 고민에 온 정신이 팔렸던 그 순간을 헤집고 역사의 한 장면이 엄습해 들어오긴 왔던 것인데, 노벤, 노벤, 노벤이란 무슨 말일까.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긴 뒤 면회를 온 다른 후배에게서 나는 그 전화의 전말을 들었다. 노무현 변호사가 6월 시민항쟁의 중심이었던 부산가톨릭센터 중앙계단에서 시민들을 모아 즉석 대토론회를 개최했더라는 거다. 가톨릭센터 안에서 그의 연설을 듣던 후배 하나가 감격에 겨워 내게 전화를 해서 노변이 지금, 노변이 어쩌구, 노변이 이렇게라고 말하고는 그 연설을 들려주려고 거리로 송화기를 들이대주었던 것이다.
그 사건의 의미를 나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새삼 사무치게 경탄하게 된다. 노무현은 부산시민항쟁의 한복판에서 넥타이부대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낸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시민들을 이끌어낸 방법은, 그 두려운 항쟁의 복판에서도 토론하고 생각하고 비전을 나누는 바로 그런 방법이었다. 토론회에는 국제시장 노점상 아주머니들과 부두노동자들과 부랑자들까지 참여하였다고 하는데, 소위 기층민중이랄 수 있는 사람들이 변호사와 나란히 민족과 국가의 장래에 대한 자신들의 열망을 토해내는 광경을, 보지 않았어도 가슴 뜨겁게 추억한다. 오늘의 노무현은 그때의 노무현으로부터 태어났으며, 점점 더 깊이 그 노무현이 되어가고 있으므로.
노무현을 발견하면서, 나는 내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나는 역사와 일상의 삶이 멀지 않음을 깨달았으며, 실천한다는 것이 단순히 착한 일 하고 봉사활동 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행위임을 또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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